이기풍 목사 생애 연표

1865 – 1942

"핍박자에서 선교사로, 선교사에서 순교자로"

1865

출생 — 평양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1865년 12월 2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여섯 살에 사서오경을 암송하고, 열두 살에는 붓글씨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청년이 되면서 억눌린 반항심과 주먹으로 이름을 날린 '평양의 깡패 두목'이 되었다.


이기풍 목사 공식 초상
이기풍 목사 공식 초상

1890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지다


평양 서문통 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미국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Moffett)**에게 돌을 던져 턱에 상처를 입혔다. 이후 장대현교회 건축 현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때의 적대감은 훗날 극적인 회심의 배경이 된다.



1894

회심 — 원산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다


청일전쟁으로 평양을 떠나 원산에 피신하던 중, 스왈른(W.L. Swallen) 선교사의 노방 전도를 듣고 무릎을 꿇었다. 꿈에서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1896

세례 — 믿음의 공식 고백


원산에서 스왈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공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평양의 사도 바울'이라 불리며, 동이 트면 나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1898 – 1901

매서인(行書人)으로 함경도 순회 전도


세례 후 스왈른 선교사와 함께 성경을 팔며 복음을 전하는 매서인으로 함경도 일대를 순회했다. 이 경험이 훗날 제주 섬 순회 전도의 원형이 되었다.




1902 – 1907

평양신학교 — 조사(助事)에서 신학생으로


황해도 안악·문화·신천·해주 등지에서 조사(助事)로 사역하던 중, 1903년 마펫 목사의 권고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생 시절 첫 부인 유씨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 윤함애와 재혼했다.


1907년 5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


1907년 5월, 서경조·한석진·양전백·송린서·길선주·방기창과 함께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 한 명으로 졸업했다. 이 해는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해이기도 했다.



1907년 9월 7일

한국인 최초 목사 안수 — 독노회 조직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 에서 한국인 7인이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기풍 목사는 그 자리에서 즉시 "제주도 선교사"로 자원, 만장일치로 파송이 결의되었다.



"마포삼열 목사의 턱에 돌을 던졌던 핍박자가, 그 마포삼열 목사의 손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7년 독노회 조직·목사 안수
1907년 독노회 조직·목사 안수

1908년 1~3월

제주도 파송 — 배가 난파되다


평양을 출발, 서울 → 목포 → 제주 항로로 출발했으나 배가 풍랑에 난파되어 많은 사람이 익사했다. 이기풍 목사는 수영으로 헤엄쳐 추자도에 간신히 상륙, 44일을 기다려 제주에 입도했다. 부인 윤함애와 자녀는 목포에 남겨두었다.



1908년 2월

제주 최초 예배 — 성내교회 설립


제주 성내(城內)에서 김재원 등 3인과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제주 최초의 개신교 예배이자, 제주 성내교회(현 제주제일교회)의 출발이다. 훗날 박영효 대감의 후원으로 1910년 교회당을 건립했다.


제주 파송 당시 사진 (1908년)
제주 파송 당시 사진 (1908년)

1908 – 1918

제주 13년 선교 — 30여 개 교회 개척


언어 장벽·미신·박해 속에서도 네비우스 선교 6방식(섬김·문화 활용·구제·순회·팀·치유)으로 제주 전역을 누볐다. 성내·삼양·내도·금성·협재·두모·용수·고산·모슬포·중문·법환·성읍·세화·조천 등 30여 개 교회를 개척하고 1,000여 명의 신자를 세웠다.



"설러버려, 설러버려, 야가기 끊어지갠(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달아난다)" — 도망치는 제주 사람들, 결국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18년 3월

광주 북문안교회 담임목사 부임


제주 사역을 마치고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1920년

전남노회장 · 총회 부총회장 선출


전남노회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을 역임했다.



1921년 10월

제10대 총회장 취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대 총회장에 피선되어 한국교회 전체를 이끌었다. 당시 함께한 임원은 서기 차재명, 회원 김익두·김선두 목사 등이었다.


1921년 총회장 취임 당시
1921년 총회장 취임 당시

1923 – 1934

전남 각지 순회 목회 — 낙도까지


순천교회(1923) → 고흥교회(1924, 4년간 자립교회로 성장) → 제주 성내교회 재부임(1924) → 벌교교회(1931, 3년 만에 300명 교회로 부흥) → 여수 우학리교회 (1934, 무보수 자원 부임). 돌산도·완도 등 외딴 섬들을 조랑말·배로 누비며 낙도 선교를 이어갔다.




1936 – 1938

신사참배 거부 — "나는 못 한다"


1936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막내딸 이사례를 신사참배 거부 학교(광주 수피아여고 → 부산 일신여고)에 보내며 가정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1938년, 72세의 노구로 순천노회 목사들(오석주·나덕환·김상두·김순배)과 함께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광주형무소로 이송 직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38년 체포 전 가족 사진 (벌교)
1938년 체포 전 가족 사진 (벌교)

1942년 6월 20일

소천(殉敎) — 여수 우학리에서 눈을 감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무너진 이기풍 목사는 마지막 사역지인 여수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1942년 6월 13일 마지막 주일 설교를 마치고, 일주일 후 소천했다고 전해진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 (디모데후서 4:7)


우학리교회 (순교지)
우학리교회 (순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