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자에서 선교사로, 선교사에서 순교자로" 이기풍 목사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단 한 사람에게서 세 가지 기적이 동시에 일어난 사람입니다.
복음의 원수가 복음의 증인이 되었고, 그 증인이 땅 끝 제주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으며, 마지막엔 그 믿음을 목숨으로 지켰습니다.
🔷 한국교회 최초 7인 목사 안수 (1907년)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7인의 한국인 목사가 최초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그 7인 중 한 사람으로, 서경조·한석진·양전백·송린서·길선주 목사와 함께 한국 장로교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외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이 스스로 목사를 세우고 스스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임을 선언한 날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목사 안수식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자주적 신앙 공동체로 탄생했음을 선포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의 사도 바울"이라 불렸으며,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제주 선교사 자원을 결단했습니다. 출처: 기독신문
🔷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선교 역사에서 가장 드문 일이 1908년 일어났습니다. 외국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가 스스로 한국인 선교사를 파송한 것입니다. 독노회 셋째 날, 길선주 목사의 사회로 열린 회의에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자"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이기풍 목사가 자원하여 파송되었습니다.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 한국 교회의 자립,자전 선교 역략 입증 : 설립된 지 단 하루만에 선교사를 파송함
- 외지 선교의 첫 출발 : 이후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 강국이 되는 씨앗
- 고난늬 선교 모델 정립 : 천주교의 외세 의존 선교와 달리, 섬김과 고난으로 복음을 전한 새로운 선교 방식
"이기풍 목사가 출항한 날, 인천항에서는 전도부인들이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한국 선교 역사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 제주 복음화의 초석 — 변화된 제주의 역사
이기풍 목사의 13~17년 제주 사역은 단순한 교회 개척이 아니었습니다. 미신·무속이 가득하고 외지인에게 철저히 닫혀 있던 섬에서, 사랑과 헌신으로 문을 연 것이었습니다.
숫자로 보는 변화:
연도변화 내용
| 1908년 | 3인과 첫 예배, 제주 성내교회 설립 |
| 1910년 | 박영효 후원으로 교회당 건립 |
| 1912~13년 | 세례교인 82명, 매주 400여명 출석 |
| 1917년 | 제주 전역 12~30개 교회 개척 |
| 2008년 (100주년) | 제주 교회 약 370곳, 성도 약 5만 명 |
"이기풍 목사가 씨를 뿌린 땅에서, 100년 뒤 5만 명의 성도가 자라났습니다."
🔷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 믿음으로 지킨 마지막 증언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했을 때, 이미 70세를 넘긴 노목사는 "나는 못 한다"는 한 마디로 역사 앞에 섰습니다. 그의 거부는 단순한 개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순교의 세 가지 의의:
① 신앙의 순수성 수호 평생 우상을 타파하고 복음을 전했던 이기풍 목사에게 신사참배는 믿음의 포기와 같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도록 가르쳤고, 막내딸 이사례는 결국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학교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② 민족 정체성과 신앙의 연대 이기풍 목사는 독립운동가 김구·안창호와 연대하며, 신앙과 민족 사랑이 하나임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일제가 그를 "미국 스파이"로 몰아 체포한 것은, 그의 신앙이 단지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족적 저항이었음을 방증합니다.
③ 한국교회 순교 전통의 원형 그의 죽음은 주기철 목사·손양원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 순교 신앙의 3대 축을 형성하며, 이후 한국교회가 핍박 아래서도 굴하지 않는 정체성을 갖게 했습니다.
"일경은 72세 노인의 몸에 고문을 가했지만,
이기풍 목사의 믿음은 끝내 꺾이지 않았습니다.
1942년 6월 20일, 그는 여수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 현대 한국교회에 남긴 유산
이기풍 목사가 한국교회에 남긴 3대 유산
유산 1
한국 선교 DNA의 기원 이기풍 목사의 제주 파송은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보내는 교회로 전환되는 역사적 기점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전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 국가가 된 것은, 1908년 그 출항에서 비롯된 정신 위에 서 있습니다.
유산 2
변화된 삶의 증거 깡패 두목에서 목사로, 핍박자에서 선교사로, 노구에서 순교자로 변한 이기풍의 생애는 "예수를 믿으면 한 사람이 완전히 바뀔 수 있음"을 역사 속에 새겼습니다. 이것은 한국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적 고백이 되었습니다.
유산 3
기념관과 성지 순례의 발원 1998년 제주 제주시에 이기풍선교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여수 우학리에도 순교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두 곳은 한국 기독교 성지 순례의 중요한 거점으로, 그의 정신을 오늘에 잇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