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그 땅 끝으로 이기풍 목사의 제주 선교 활동


1908년, 아무도 가려 하지 않던 섬 제주에 홀로 발을 내디딘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17년간 온 섬을 누비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그 열매는 오늘 제주 교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  왜 제주였는가?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던 땅


1907년 9월, 한국 교회 역사상 최초의 독노회가 조직되던 날, 마펫 선교사는 갓 안수받은 7인의 목사들에게 물었습니다.


"제주도에 선교사로 자원할 사람이 있습니까?"


제주도는 당시 육지에서 뱃길로만 닿을 수 있는 절해고도였고, 1901년 이재수의 난으로 서양 종교에 대한 극심한 배타심이 남아 있던 곳이었습니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던 그 순간, 이기풍 목사가 손을 들었습니다.


"나도 예전에 복음 전하는 선교사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이제 나 역시 그런 곳으로 가겠습니다."


제주행의 이유는 단 하나, 박해받던 선교사의 심정을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파선과 기적의 입도 (1908년 2월)

바다도 막지 못한 사명


1908년 1월, 이기풍 목사는 평양역을 출발해 서울을 거쳐 목포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는 부인 윤함애 사모를 목포에 남겨두고 혼자 먼저 제주행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도중에 난파되었습니다. 탑승자 대부분이 익사하는 가운데, 이기풍 목사는 헤엄쳐 추자도에 간신히 상륙했습니다. 며칠을 굶어 실신하여 쓰러진 그를 한 해녀가 발견해 집으로 데려가 살렸습니다. 훗날 그 해녀는 제주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추자도에서 다시 배를 얻어 타고, 1908년 2월, 이기풍 목사는 마침내 제주 땅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평양을 떠난 지 44일 만이었습니다.


"그의 제주 도착 자체가 이미 기적이었다."


이기풍 목사 제주 파송 당시 초상 사진
이기풍 목사 제주 파송 당시 초상 사진

🔷 첫 예배와 성내교회 설립 (1908년)

뽕나무 아래서 시작된 예배


제주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는 먼저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목포 출신으로 이미 서울에서 예수를 믿고 제주로 돌아온 김재원이 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1908년 2월 1일, 이기풍 목사는 김재원을 포함한 세 명의 신자와 함께 향교골 뽕나무 아래서 첫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제주 최초의 개신교 예배였습니다.

이후 중인문 안의 초가 두 채를 구입하여 예배당과 사택으로 사용하다가, 1910년 당시 박영효 대감의 재정 후원으로 군사훈련원(출신청) 건물을 구입하여 제주 성내교회를 정식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제주 기독교의 모(母)교회가 되었습니다.

제주 성내교회 첫 예배당 (출신청 건물)
제주 성내교회 첫 예배당 (출신청 건물)

🔷 핍박과 위기 속의 선교

200명이 죽이기로 서약한 사람


초기 선교는 극도로 위험했습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도착한 직후, 음식물을 말똥으로 오염시키는 이른바 **'말똥 사건'**이 발생하며 도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제주 성안에는 그를 잡겠다는 방(榜)이 붙었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기풍을 죽이기로 서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났습니다. 마침 경성에서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어 있던 박영효 대감이 도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고, 그가 이기풍 목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주면서 극단적인 위협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이기풍 선교기념관
이기풍 선교기념관

🔷 네비우스 선교 전략 6가지

섬기고 나눠 마음을 열다 — 이기풍의 선교 전략


이기풍 목사는 당시 한국 선교에 효과적이었던 네비우스(Nevius) 선교 방법을 제주 실정에 맞게 적용하여 6가지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① 섬기는 선교 — 농사일을 함께 제주 남성들의 밭일을 직접 도왔습니다. 항상 일복과 농기구를 챙겨 다니며 농번기에 일손을 보탰고, 그렇게 열린 마음에 복음을 심었습니다.

② 문화를 활용한 선교 — 엽전 게임으로 천국과 지옥을 제주 청년들이 즐기던 엽전 돌리기 게임을 전도의 도구로 삼아, "이쪽은 천국, 저쪽은 지옥"이라고 설명하며 복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③ 구제 선교 — 홍수 피해자를 구하다 1909년 큰 홍수 때 물에 빠진 5명을 직접 구조하고 난민 구제 사역을 펼쳤습니다. 이는 이재수의 난 이후 서양 종교에 냉담했던 제주 도민의 마음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④ 순회 선교 — 제주 전역을 말을 타고 조랑말을 타고 제주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1년 내에 11명의 회심자를 얻었고, 첫 2년 안에 출석 교인 20명을 넘어섰습니다.

⑤ 팀 사역 — 여성 전도사, 학생 선교단과 함께 1908년 평양여선교회가 파송한 이선광 여전도사, 1909년 숭실대학 학생 선교비로 파송된 김형재 전도사, 성서공회 매서인이 합류하여 팀으로 선교했습니다.

⑥ 치유와 능력 선교 — 11세 장애 소년을 일으키다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 판정을 받은 11세 다리 장애 소년을 위해 7일간 기도한 끝에 걷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환자들이 몰려오고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조천교회 역사 사진
조천교회 역사 사진

🔷 17년간의 결실 (개척 교회 목록)

제주 전역에 심긴 복음의 씨앗


이기풍 목사는 1908년부터 1915년까지 1차 제주 사역을 마치고, 1927년 다시 제주로 돌아와 성내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총 17년간 제주를 섬겼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개척하거나 설립에 기여한 교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도교회명비고

1908년제주 성내교회제주 최초 개신교 교회 / 제주 모(母)교회
1908년금성교회최초 동역자 김재원과 함께 개척
1909년조천교회제주 동부 지역 복음 거점
1909년모슬포교회제주 남부 지역
1910년대삼양교회성내교회 분립
1910년대한림교회제주 서부
1910년대협재교회
1910년대용수교회1913년 설립
1910년대두모교회
1910년대세화교회
1914년중문교회
기타성읍·내도·조춘·고산·법환교회 등



총회 통계(1913년 기준): 세례교인 82명, 학습교인 84명, 매 주일 출석 400여 명, 예배당 3곳, 기도처 5곳, 학교 1개


이기풍 목사의 제주순례 선교루트를 보여주는 지도.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이기풍 목사의 제주순례 선교루트를 보여주는 지도.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 교육과 사회 사역

복음과 함께 교육을 심다


이기풍 목사는 영혼 구원과 함께 교육 사역에도 헌신했습니다. 제주에 기독교 학교 영흥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하여 신앙과 교육을 함께 전했습니다. 제주 여성들을 위한 부인조력회도 조직하여 여성들의 신앙 교육과 자립을 도왔습니다.

당시 제주는 무속 신앙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18,000개가 넘는 신상이 있다고 할 만큼 미신이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교육 사역은 이러한 미신 문화를 복음의 빛으로 대체해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 제주 선교의 유산

100년을 이어온 복음의 열매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첫 발을 내디딘 1908년을 제주 기독교 복음화의 원년으로 삼아, 2008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대회가 열렸습니다.

2008년 기준, 제주도에는 370여 교회, 5만 성도라는 놀라운 결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1908년 뽕나무 아래 세 사람과 함께 드린 첫 예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