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최초의 선교사 이기풍 목사의 생애


박해자에서 순교자로 — 돌을 던지던 손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의 거친 청년에서 한국 최초의 파송 선교사가 되어, 제주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한국 교회의 사도 바울입니다.

🔷 출생과 성장 (1865~1890)

평양의 거친 청년


이기풍 목사는 1865년 12월 23일(또는 1868년 11월 21일) 평양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출생 연도는 두 기록이 존재하며, 일부 학자들은 직접 쓴 족보를 근거로 1868년을 정설로 봅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개가 넘쳤던 그는 한학(漢學)을 익혔으며, 12세에 붓글씨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평양의 거리를 주름잡는 난봉꾼이자 포졸(하급 관리)로 살아가며 술과 싸움으로 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선교사들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야 할 이방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이기풍 목사 공식 초상
이기풍 목사 공식 초상

🔷 박해자에서 구도자로 (1890~1895)

돌을 던지던 손 — 회심을 향한 여정


1890년대 초, 이기풍은 평양 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있던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턱에 큰 부상을 입혔습니다. 선교사가 피를 흘리며 쓰러질 만큼 심각한 폭행이었고, 이 사건으로 마펫 선교사의 턱에는 평생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 돌을 던진 손을 복음의 손으로 바꾸는 데 있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을 휩쓸자 이기풍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평양성을 탈출하여 원산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1895년, 스왈른(W. L. Swallen) 선교사의 노방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복음을 제대로 듣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음성에 무릎을 꿇고 회심하게 됩니다.

1896년, 이기풍은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공식적인 신앙인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기풍 목사 가족사진
이기풍 목사 가족사진

🔷 회심과 헌신 (1895~1903)

용서를 구하고 헌신을 선택하다


세례를 받은 이기풍은 오래 전 자신이 돌을 던져 부상을 입혔던 마펫 선교사를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고 지난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그를 따뜻하게 품었고, 이 극적인 화해는 이기풍의 신앙을 더욱 깊게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이후 이기풍은 스왈른 선교사의 "조사(助事, 전도사 역할)'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황해도와 평양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보조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거친 평양 청년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보고 그를 "평양의 사도 바울"이라 불렀습니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단체 사진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단체 사진 (1907년)

🔷 신학 교육과 목사 안수 (1903~1907)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


1903년, 마펫 선교사의 권고로 이기풍은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에도 그는 6개월의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조사 신분으로 황해도 각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1907년 5월, 마침내 이기풍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중 한 사람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같은 해 9월, 한국 교회 역사상 최초로 조직된 독노회(獨老會)에서 한국인 목사 7명이 동시에 안수를 받았으며, 이기풍은 그 7명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함께 안수받은 이들 중에는 대부흥 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도 있었습니다.


"이기풍은 '최초'와 '제1회'라는 수식어를 가진 인물이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한 명, 그리고 최초의 한국인 파송 선교사."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

🔷 제주 선교와 개척 (1908~1918)

땅 끝 제주를 향한 자원 선교사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독로회는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약 1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지만 복음이 전혀 닿지 않은 미전도 지역이었습니다.

이기풍이 자원하여 나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도 예전에 복음 전하는 선교사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이제 나 역시 그런 곳으로 가겠습니다."


1908년 3월, 이기풍 목사는 부인 윤함애 사모와 함께 제주도에 입도하여, 한국 교회 최초의 파송 선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낯선 섬 문화, 극심한 핍박과 몰이해 속에서도 그는 말을 타고 섬 구석구석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약 10년간의 사역을 통해 12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새뮤얼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사진
새뮤얼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사진

🔷  교단 지도자로서의 사역 (1918~1933)

교단의 지도자, 섬기는 목회자


제주 사역을 마친 이기풍 목사는 1918년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이어 1920년에는 전라노회장, 1921년에는 제10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취임하며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중책을 맡았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편안한 대형 교회보다 어렵고 소외된 교회를 찾아다니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연도사역지

1923년전남 순천교회
1924년전남 고흥교회
1927년제주도 성내교회 (재부임)
1934년여수 남면 우학리교회


칠순의 노구(老軀)에도 낙도의 작은 교회를 찾아가 섬기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1907년 독노회 조직 / 목사 안수 사진
1907년 독노회 조직 / 목사 안수 사진

🔷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1938~1942)

끝까지 지킨 신앙 — 순교의 길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조선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굴복하거나 침묵하던 그 시절, 이기풍 목사는 호남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과 결속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정면으로 이끌었습니다.

1938년, 일제는 이기풍 목사를 미제(美帝)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오석주·나덕환·김상두·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체포하였습니다. 칠순을 넘긴 노인을 향해서도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결국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직전, 고문으로 인해 졸도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 입은 상처와 고문 후유증은 깊었습니다.

1942년 6월 20일, 이기풍 목사는 마지막 사역지 여수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77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죽는 날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는, 한국 교회의 순교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었다. 박해자로 시작하여, 순교자로 마쳤다."



이기풍 선교기념관 (제주)
이기풍 선교기념관 (제주)

🔷 가족과 신앙의 유산

신앙의 씨앗을 남기다


이기풍 목사의 반려자이자 사역의 동역자였던 **윤함애 사모(1879~?)**는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이기풍 목사의 모든 선교 여정을 함께하며 제주와 전남 각지에서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4남 2녀가 있었으며, 막내딸 이사례 권사는 아버지의 신앙 유산을 후세에 전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손자 이성근 목사 또한 목회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유해는 처음 우학리에 안장되었다가, 1953년 광주 기독교인 묘지로 이장되었고, 1988년 후손들의 뜻에 따라 다시 안치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 제주 선교 활동 사진
이기풍 목사 제주 선교 활동 사진